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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다부동전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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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5) 사단장 노린 적의 야습 [중앙일보]

2010.03.15 02:39 입력 / 2010.03.15 09:53 수정

내 목에 소 1000마리값 현상금 … 적은 한밤에 사령부를 급습했다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했던 북한군의 일부 부대가 인공기를 앞세우고 공격에 나선 모습이다. 때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독전대의 총구를 뒤로한 채 북한군은 50년 8월 말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공세를 벌였다. 국군과 미군은 이에 강력한 반격전으로 맞섰다. [중앙포토]
1950년 8월 18일, 다부동 상황이 계속 심각해지면서 미군에 이어 국군의 증원부대도 오고 있었다. 국군 8사단 10연대 소속의 한 대대가 먼저 사단 CP가 있는 동명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왔다. 아주 먼 길을 걸어온 모양새였다. 오후 5시 무렵이었다.

그때는 다부동 전면의 동쪽 능선에 해당하는 가산(架山)산성 쪽에 적들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구를 정면으로 포격할 수 있는 위치여서 우리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국군 증원부대는 그래서 필요했다. 가산산성으로 파견해 적을 막아야 했다.

선두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김순기 소령이었다. 1948년 내가 정보국장으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부하였다. 반갑다는 생각도 잠시였다. 너무 지친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순기야,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김 소령은 “아이고, 사단장님…아직까지 밥도 못 먹었습니다”고 대답했다. 영천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는 길인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줄곧 걷기만 했다는 것이다. 속속 도착하는 장병의 모습에서 피곤함과 갈증, 배고픔의 기색이 완연히 풍겼다. 이들을 전선에 바로 올려 보내야 할 전선의 상황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돼지 세 마리를 잡게 했다. 일단은 이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쉬는 시간을 줘야 했다. 그래야 전투도 잘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나는 문형태 작전참모에게 “내일 새벽 일찍 올려 보내자”고 말했다. 사단 본부대원들이 CP 바깥 마을에 나가 돼지를 사왔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벌어졌다. 길고 고달픈 행군 끝에 맞이하는 풍성한 만찬으로 증원부대원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이들은 동명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새벽에 가산산성으로 진격할 준비도 했다.

그날 밤이었다. 나는 동명 국민학교 교사 뒤편에 있는 선생 숙직실에 묵고 있었다. 밤 11시쯤 잠에 들었다. 잠결에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 뭔가 부서지면서 ‘와당탕’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때 부관이었던 김판규 대위가 뛰어들어왔다. “사단장님, 사단장님, 큰일났습니다…적, 적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 순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사단 사령부에 적이 나타나다니. 나는 ‘그럴 리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침실 밖으로 나갔다. 이어 교사 안으로 들어섰다. 사단 참모와 미 고문관들이 하나같이 복도에 바짝 붙어서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총탄이 날아들어 오고 있었다. 기관총에 수류탄까지 터지고 있었다.

동명 국민학교를 정문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 담장, 그곳에서 적이 공격을 가해 오고 있었다. 중대 병력 이상은 돼 보였다. ‘정말 큰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복도와 교사에서 운동장으로 나 있는 문을 향해 뛰었다.

“순기야, 순기야, 너 지금 뭐 하냐. 빨리 부대를 출동시켜. 놈들이 저 밖에 있어!” 내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김순기 소령이 뛰어나왔다. 그는 다행스럽게 지휘를 잘했다. 운동장에서 숙영 중이던 대대 병력이 바로 집결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화기(火器)를 모두 갖추고서 신속하게 출동했다. 일부는 적이 진입하려는 오른쪽 담장으로 접근했고, 일부는 정문을 빠져 나와 적을 향해 우회하면서 사격을 했다. 출동한 대대원들에 의해 적은 다시 쫓겨 갔다.

적이 가산산성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야밤에 1사단 사령부를 기습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적의 야습 목적은 국군 1사단장인 나를 생포하는 것이었다. 현상금도 걸렸다고 한다. 북한 돈 10만원이었다. 당시 북한 돈 100원으로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아주 큰 현상금이 걸려 있었던 셈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 나는 군화를 벗지 않고 잠에 든다. 이날도 그게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진압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신발끈을 매는 데 시간을 들였다면 대대원들을 빨리 출동시키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증원부대원들을 학교 마당에 하룻밤 재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치고 피곤함에 절었던 그들을 그날 오후에 바로 가산산성의 전선에 투입했더라면 국군 1사단 지휘부는 전멸했을 것이다. 사단 CP에는 헌병 20~30명이 경비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300명 이상의 적에게 그 정도 숫자의 헌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선을 지키러 먼 길을 걸어온 대대원들에게 베풀었던 조그만 배려가 이렇게 나의 목숨과 사단 지휘부의 전멸을 막아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천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미 고문관 메이 대위가 내게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사단장님, 앞으로는 CP 경계를 대폭 강화해야겠습니다.” 옳은 말이었다. 나는 1사단 병력 중 2개 소대를 차출했다. 경기관총으로 무장시킨 뒤 사단의 안전을 그들에게 맡겼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위기에 대비하는 경계(警戒)의 중요성. 이날 밤 적의 야습(夜襲)이 일깨워준 교훈이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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