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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55년간 미군부대 옷수선한 신옥자 할머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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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군복 100여벌 수선' 신옥자씨에 미군서 은퇴식
"군복에 새 계급장 달면아들 출세시키는 기분가슴 아파… 떠나기 싫어"
할머니 얘기에 '울음 바다' 美 국무부 훈장 받기도…
한국부임 사령관마다 찾아, 위컴 前 미군 사령관은 작고한 남편에 '형님' 호칭

지난달 18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용산동 미8군 기지 PX(매점) 안 식당에서 식탁을 가득 메운 덩치 큰 미8군 장병 100여명 앞에 키 155㎝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신옥자(80) 할머니가 섰다. 신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 더듬더듬 영어로 인사말을 했다.

"I did my best, but I cannot work anymore. I wish I could stay longer, but I do not have the abilities(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일을 못 하게 됐습니다. 더 오래 남길 바랐지만 기력이 따르질 못합니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장병들이 모두 일어서 손뼉을 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장병들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신 할머니를 포옹하면서 외쳤다. "Thank you for caring us!(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You are an amazing woman!(당신은 놀라운 여성입니다!)" "You were my second Mom!(당신은 '제2의 어머니'였어요!)"

신 할머니 눈가에 고인 눈물이 깊게 팬 주름을 타고 흘렀다. 그는 "가슴이 아파. 떠나기 싫어"라고 말했다. 곁에 있던 앤더슨 대령(여·45)이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중위였을 때 할머니가 '넌 대령감이야'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얼마 전 정말로 대령이 돼서 한국에 부임했는데 벌써 떠나시면 어떻게 해요." 신 할머니가 앤더슨 대령의 눈물을 손으로 훔쳐줬다.

1955년부터 55년간 서울 용산 미8군 기지에서 매일 100여벌의 장병 군복을 수선했던 신옥자(80) 할머니가 주한미군 사령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소개하며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날 행사는 1955년부터 지금까지 미8군 장병들의 옷을 고쳐주던 신 할머니를 환송하는 파티였다. 용산기지 안 상가건물 15평(49㎡) 공간이 신 할머니의 수선 작업실이었다. 5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미군 장병들의 군복을 수선해주고 명찰과 계급장, 부대마크를 달아줬다. 장병 부인들의 파티 드레스나 평상복도 모두 신 할머니 손을 거쳤다.

신 할머니는 6·25전쟁 전 남편 길영래(1997년 작고)씨와 결혼해 평택에서 살다가 1951년부터 천안 성환의 미군 부대에서 세탁소를 운영했다. 1955년 이 부대가 철수하자 미8군 기지로 옮기게 됐다. 한국군 대위가 "옷 수선을 잘한다"고 소개했다고 한다. 아들 3형제와 기지 내 막사에서 살았다. 전쟁 직후라 세탁물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옷을 누가 자꾸 훔쳐가는 통에 세탁소는 접고 수선집만 하게 됐다.

신 할머니는 "1년 365일 중 크리스마스와 추석 3~4일을 빼고 매일 일했다"고 했다.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이등병부터 4성 장군들 옷까지 하루 100여벌을 손봤다. 명찰 각도에서 실오라기 하나까지 온 정성을 다했다. 그런 그를 미군들은 'Woman of Iron(철의 여인)'이라고 불렀다.

위컴(Wickam·1979~1982) 전 주한미군 사령관 부부(가운데 두 사람)와 신옥자 할머니 부부가 장군의 환송식 파티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두 부부는 위컴 장군이 신 할머니의 남편 길영래씨를‘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 신옥자씨 제공

 

신 할머니가 미8군에서 일한 1955년부터 지금까지 미8군 사령관을 거쳐 간 장군은 모두 22명이다. 떠나는 사령관은 후임자에게 항상 "한국 용산기지에 발령받으면 무조건 신 할머니를 먼저 찾아라"고 조언했다. 2006년부터 2년간 주한 미군사령관을 지낸 벨(Bell) 장군은 2006년 신 할머니가 미 국무부 훈장을 받도록 추천했다. 당시 벨 사령관은 훈장 전달식 때 "처음에 전임자에게서 신 할머니를 꼭 만나라는 이야기를 듣고 서울시장이나 국무총리인 줄 알고 겁이 덜컥 났었다"고 말했다. 신 할머니는 "벨 장군은 1주일에 2~3번 들러서 '문제없느냐' '누가 당신을 힘들게 하느냐'고 물어 아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신 할머니는 미군 장병들의 파티에도 자주 초청받았다. 10년 전 대령으로 은퇴한 잭슨(Jackson·55)씨는 "그녀가 이브닝가운을 입고 파티에 가면 장병들이 할머니 주위로 몰려들었다"고 했다. 그는 "신 할머니는 군인들이 '아침 8시에 승진 행사가 있다'고 하면 7시에 나와서 미리 군복에 새 계급장을 달아주며 항상 우리에게 맞춰 희생했다"며 "그녀는 미군들의 대모(代母)나 다름없다"고 했다.

2007년부터 용산에 근무하고 있는 블룸(Blum·46) 대령은 "여덟살 아들이 미국에 친할머니가 있는데도 자꾸 신 할머니를 '그랜드맘'이라고 부르며 시간이 날 때마다 수선집에 간다"며 "아들에게 '태권도 잘해라'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라'고 가르치는 신 할머니를 보면 나도 고향에 온 것 같다"고 했다.

지난달 18일 미8군 영내 타운하우스 식당에서 신옥자 할머니 은퇴기념 파티가 열렸다. 신 할머니(왼쪽)와 PX지배인 스탠리 영(Young)이 샤프(Sharp) 주한 미군 사령관이 수여한 상패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 미8군 제공

 

10여년 전 같이 수선일을 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신 할머니는 "그때 그만둘까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미군들이 차가워 보이기는 해도 정은 많아. 무엇보다 새로운 계급장을 달아주면 아들내미 출세시키는 기분이었어. 어떻게 그만두나."

환송파티가 열리기 전날인 17일이 신 할머니의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신 할머니는 "그날 장병들로부터 옛날부터 받았던 수백통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고 다 찢어서 버렸다"고 했다. 그는 "편지를 보고 있으면 또 출근해야 할 것 같아서"라고 했다.

기지로 출근하지 않는 요즘도 "박음질 잘하라, 먼지 털자"고 잠꼬대를 한다는 신 할머니는 "55년간 미군 부대에서만 살다 보니 반찬 물가도 모르고 옷도 안 사봤는데 이제 나도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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